이야기는 약 2년 전, 변호사를 하시던 동문과의 식사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분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셨지만, 사법고시를 보고, 변호사 생활을 꽤 오래 하시다가, 이제는 사실상 은퇴를 하시고, 저에게 밥을 사주신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사기꾼을 만나고, 어쩔 때는 피해자, 어쩔 때는 가해자를 위해 변호를 해왔다. 그런데, 사기범은 자신들이 은닉한 범죄 수익이 아주 많아서, 자신들이 감옥에 가더라도, 기쁘게 감옥 생활을 하고, 피해자는 검사가 사기범의 유죄를 입증하더라도, 피해를 보상 받지 못해, 법률적으로 정의가 실현되더라도, 그 삶이 불행해 보였다."
이 분은 저에게, 수 많은 사기꾼과 범죄자를 만난 경험, 그리고 오랜 변호사 생활을 바탕으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제는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50%에 딱 물 한 방울 탄 만큼, 51% 가 안 될 만큼만 사람의 말을 믿는다. 그리고 그런 태도로 살아야 삶이 덜 피곤하고, 덜 위험해지는 것 같다."
즉, 변호사로 일을 하실 때도, 의뢰인의 말은 최대 51% 정도만 믿고, 정말로 선량해 보이는 사람이나 피해를 당해, 구제를 받기 위해 온 의뢰인이나 피해자의 말도, 51% 이상은 믿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미, 이 전에 거래처에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 말에 공감할 수 있었고, 살면서 만나는 사업가들의 절반 정도는 사기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사업하는 사람의 절반은 사기꾼이라는 말은 이 분한테서만 들었던 이야기는 아니었고, 스타트업 업계에 있는 분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이며, 경험적으로도, 꽤 많은 스타트업 대표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50%에 물 한 방울만큼 더 세상을 신뢰하는 태도는 약 1년 정도 더, 제 마음 속에 유지되었습니다.
2024년이 되었습니다.
대학 동기들 중에서 가장 고생하는 친구들은 가장 공부를 잘 하고, 가장 먼저 박사 학위를 받고 나와 교편을 잡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친구들과는 가끔 연락을 하지만,
아무래도 조교수 신분으로 일을 하다보니, 20대 내내 정말로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가장 일이 고되고, 금전적인 보상도 가장 적게 받고 있는 친구들이었습니다.
현재 모 대학에 재직 중인 동기 한 명에게 제가 먼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 중 절반이 사기꾼이란 얘기는 업계에서도 통용되는 얘기고, 나 뿐만 아니라, 사업하면서 크고 작은 사기를 한 번도 안 당해본 대표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동기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R&D 과제를 심사하러 가면, 절반이 아니라, 80%가 사기꾼인 것 같던데..."
세상이 이 정도로 혼탁할까 속으로 반문했지만, 교수님을 다독이며, 저는 다시 일을 했습니다.(아직은 51%)
9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저는 데모 데이 참가를 위해 양재동을 찾았습니다.
발표 평가는 비슷한 산업 분야의 회사끼리 묶어서, 비슷한 시간대에 진행되었으며,
같은 조에 속한 참가팀은 같은 조의 발표가 모두 끝날 때까지 모든 발표를 듣고,
발표장을 빠져나갈 수 없었습니다.
제 앞에 순번으로 발표를 진행하는 회사들은
GIS,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업체들이었고,
당연히 저희 회사의 사업과 관련이 있는 분야이고, 저도 컴퓨터를 전공했다보니,
이 회사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1. 첫 번째 회사는 자신들이 다양한 파일에서 데이터를 추출하여, 수치화 및 데이터 분석을 하는 사업을 하는 회사라 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OCR 기반 기술인 것으로 판단하였지만, 자신들이 가진 고유의 LLM을 기반으로 그래프나 차트, 그림에 들어있는 정보들까지
기존의 솔루션 대비 110~1100% 가량 높은 효율성을 갖고 전부 추출하여, 텍스트, 수치, 파이차트 데이터까지 전부 분석해낸다고 발표하였습니다.
LLM을 작은 스타트업이 직접 디자인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은데, 여기에 비전 데이터까지 전부 처리하는 multi-modality를 가진 모델로 업무를 효율화하겠다는 대단한 AI 스타트업을 보면서, 저는
"구글도 제대로 못 하는 multi modal AI 를 자유 자재로 구현하는 스타트업이 왜 여기 있으신가요?"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지만, 가만히 발표를 들었습니다.
차라리 Chat GPT나 하이퍼클로바 AI의 API를 활용해 LLM 비즈니스를 하겠다면 납득이 되었겠지만, 이 분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분들의 발표는 기술을 모르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그럴듯하고, 슬라이드도 예쁘고 선명하게 디자인되어 있었으며, 발표자도 특유의 화법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제품을 그럴듯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심사를 하러 나온 심사 위원들은 역평가 및 민원이 걱정되는 것인지, 약간 멍청한 것인지, 이 회사가 주장하는 메트릭과 데이터, 기술에 대한 질문보다는 사업적인 부분만을 질문하였습니다.
평가는 전문 심사 위원뿐만 아니라, 일반 청중들도 함께 하였으며, 기술을 잘 모르시는 일반인들은 당연히 번지르르한 발표를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이 회사가 비교한 기존의 솔루션이 무엇이고, 벤치마크 데이터가 무엇인지조차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VC들이 좋아하는 숫자를 말하면서, 슬라이드에 열심히 그래프와 메트릭을 써 놓은 모습은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어떤 교수님의 연구 발표를 연상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연구에 사용한 데이터를 결과가 잘 나오도록 일부만 선별해서 활용하면, 당연히 연구 결과가 잘 나오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걸로 논문도 내시고, R&D 지원금도 받으시는 교수님을 보면서, 제 친구들은 왜 작은 연구 과제 하나도 못 따서 저렇게 고생을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 다음 회사는 무려, 싱가포르에도 회사를 차려놓고, 수 십억 원의 투자를 받은 GIS 소프트웨어 회사였습니다. 이 회사의 대표는 모 대학의 교수와 함께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자신이 오늘 아침에 싱가포르에서 데모데이 참가를 위해 귀국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제품이 세계 최고의 제품보다 높은 기술력과 시장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홍보하였습니다.
발표 중간에 제품 영상을 하나 재생했는데, 영상은 지구본 3D 모델을 한 바퀴 돌리는 영상이랑 크게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관성 센서와 지상 기준점 등이 없이 정밀 측위를 하고, 지하나 실내 등 특수한 환경에서 측위와 3D 공간에서의 원거리 구조물 탐지 등 공간 정보 구축이 힘들단 사실은 측위 기술을 연구하는 동문 교수님들이나 측량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전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저는 이 회사가 발표에서 주장하는 목표 시장의 기업을 이미 발표 몇 개월 전에 부산에서 직접 만나고 온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사가 발표에서 말한 기업이 이 회사의 제품의 주 고객도 아니고, 관심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저는 발표장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평가에 참가하시는 분들은 이 회사의 누적 투자 유치액과 대표의 말을 이미 필터링없이 체내 비휘발성 저장 매체에 저장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발표가 끝나고 발표장을 나왔습니다.
이 사업은 탈락자가 되지 않으면, 페널티가 없는 사업이라,
저는 탈락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3주 정도 뒤, 저는 평가 결과를 공문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 등수는 전체 13 등, 다행히 평가에서 탈락하지 않았습니다.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이 공문에는 모든 참가 업체의 등수가 함께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던, 1번과 2번 회사의 등수를 각각 살펴보았습니다.
5등, 3등
1등이 아니란 것에 박수를 쳐야할지,
혹은 1등은 또 얼마나 대단한 거짓말을 했을지 생각하면서,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80%는 사기꾼이야!"
이제서야 저는 귀중한 말씀을 해주셨던 박사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박사님. 앞으로는 인류애를 갖고 살기 위해, 박사님의 20%에 물 한 방울 만큼만 더 사람들을 믿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열심히 연구하고 고생하고 있는 제 동기 교수님들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제가 점점 부족해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독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사업을 하는 사람을 상대한다면, 그 사업가를 상대하는 사람들에게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그 말을 믿니?"
꺼진 불도 다시 봐야하는데, 경우에 따라, 수 억 원 이상의 돈이 오가는 사업에서,
어떤 사람의 말을 곧이 곧대로 일단 믿거나
의심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낳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계속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회사들과 발표 평가를 하신 분들 덕분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2개의 회사는 이 사업에서 최종 탈락하였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보다 낮은 등수를 해서 화가 나야 할지,
발표 평가에서 탈락하지 않아서 기뻐해야 할 지 잘 모르겠지만,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면서, 오늘도 일을 계속해보고자 합니다.
오늘도 정직하게 버티시는 분들의 무궁한 행운과 행복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