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ep Dive

카리스마

Written by 문귀환 | 2025. 1. 18 오후 3:25:42

카리스마는 다른 사람을 매료시키고 영향을 끼치는 능력을 말합니다.

대학생 시절, 컴퓨터를 그닥 좋아하지 않고,

소질도 부족했던 저는 학교 수업과 과제를 따라가고 퀴즈 준비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소프트웨어 실습실에서 노숙을 해야 했습니다.

조금 여유가 있던 날에도 학식을 먹고 과제와 씨름하다가,

정문에서 마지막에 출발하는 750번 버스를 수없이 놓쳤습니다.

 

막차를 놓치면, 터벅터벅 언덕을 걸어 20분 동안 공대 건물까지 걸어 올라가거나,

40분 동안 고개를 넘어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서

심야 버스를 타고 새벽 2시가 돼서야 집에 갈 수 있었고,

집에 갈 수 있던 날은 그나마 운이 좋은 날이었습니다.

 

납땜을 하던 학기에는 거의 매주 2회는 밤을 새야 했고,

새벽 12시 피자 배달 마감을 놓치면,

치킨밖에 배달할 수 있는 음식이 없어서,

학기 내내 새벽 2시에 질리도록 치킨과 컵라면을 먹다가,

그 학기 이후 졸업 전까지는 거의 치킨과 컵라면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밤낮을 바꿔 사는 삶은 아니었고, 보통 11시 혹은 1시에는 전공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면 가스가 뿌려진 것 같은 집에서 1시간 이상 걸리는 대학교를 통학하면서

수업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고통스러운 학기에는 집에 못 간 날이 꽤 많았습니다.

물론 수업이 있기 때문에, 집에 못 가더라도 새벽 3시 30분이 넘어가면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다행히, 실습실 의자엔 팔걸이가 없었습니다.

실습실 의자 3개를 붙이면 사람 키보다 약간 부족한 만큼 누울 공간을 만들 수 있었고,

무릎을 접어 발을 땅에 대고 벤치 프레스 자세처럼 누워 자거나,

몸을 웅크리거나 다리를 띄운 상태로 잠을 자면,

아침 수업 시작 전까지는 잠을 자고, 공대 식당에서 밥을 먹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의자 4개는 공간이 부족해서 붙일 수 없었고, 몇 분은 실습실 맨 뒤에 상자를 뜯어서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누워서 잠을 잤습니다.

 

당시 과방, 동아리방, 소프트웨어 실습실 등에 상주하던 사람들은

NPC들로 불렸는데, 저는 소프트웨어 실습실 중간에 노숙하던 NPC였습니다.

그 시절 친해진 분들 중 몇 분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하고 지냅니다.

최근에는 상자 위에서 자던 NPC 중 한 분도 창업을 하였습니다.

저는 짧지만 대기업에도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팀 규모는 30여 명 가량이었고, 개발자만 한 팀에 10명이 넘게 있었습니다.

당시 팀장님은 담배를 피러 너무 자주 사무실 밖에 나가긴 했지만, 일은 잘 하시는 분이셨고,

팀에서 저는 제일 일을 못 하는 막내였지만, 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일을 제대로 못해서 팀장님께 자주 갈굼을 당했지만,

팀장님이 하시는 말씀은 대부분 맞는 말이라,

이를 수긍하고, 노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개발자를 만난 것도 이 당시입니다.

이 분은 과 선배이기도 하지만, 직장 상사이기도 했으며,

제가 살면서 만난 개발자 중 가장 디버깅을 잘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저는 항상 버그를 잡지 못해 많은 고생을 했는데,

매일같이 버그 잡기에 실패하고, 버그를 형님께 들고 가면, 형님께선 저 대신 버그를 잡아냈습니다.

보통, null pointer exception 버그가 대부분이었고, 매번 저는 스택 트레이스를 몇 번 돌리다 포기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분은 스택 트레이스를 50번 해서라도 포인터가 구멍 나는 곳을 다 찾아내었고,

한 번도 버그를 잡아내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이 이후로 저는 살면서 한 번도, 스택 트레이스를 50번 이상 해서라도 버그를 잡아내는 개발자는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근성 없고 일도 제대로 못 하던 제가 매번 와서 도움을 요청해도 형님은 한 번도 화를 내신 적이 없습니다.

묵묵히 모든 버그를 잡아주시던 진정한 성인 군자 선배님께 죄송하다는 말씀과 감사하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업계에서는 디버깅을 잘 하는 사람이 진짜 개발자라는 말을 합니다.

이 이후로 저는 이 분보다 디버깅을 잘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필드에서 구르면서, 이 때의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 분은 디버깅을 잘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이 분은 스택 트레이스를 50번 이상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메모리를 계속 뒤져 모든 것을 찾아내는 무시무시한 근성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1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선배가 보여주신 무시무시한 근성은,

이후 제가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분은 개발자로서의 제 삶에 정신적 스승이며,

디버깅은 근성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분이며,

근성이 곧 실력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 이후, 주니어 개발자를 만나거나 개발자 커리어를 시작한 분들에게는 항상 이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살면서 만난 가장 뛰어난 개발자는 스택 트레이스를 50번 이상 하더라도, 무조건 버그를 찾아내는 근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금의 제가 그 분처럼 스택 트레이스를 50번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고,

현재 저는 개발자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 분이 보여주신 집요함과 인내심은 고통 속을 나아가는 데 큰 힘을 주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떤 투자자 하나가 저에게 어떤 회사 대표를 소개해줬습니다.

저는 당시, 이 투자자가 저를 도와주려는 줄 알고, 그 회사 대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팅 자리에서 이 대표는 제게 회사를 접고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팅 도중, 이 대표는 자신의 제품을 보여줬는데, 이 제품은 1GB짜리 이미지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는

멍텅구리 제품이었습니다.

 

40GB 짜리 이미지를 다루는 옴니스랩스 주식회사의 대표가 가짜 1GB 짜리 멍텅구리의 밑에 들어갈 이유는 없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회사의 임원과 대표는 저희 제품을 염탐하고,

옴니스랩스 주식회사의 Youtube도 구독하고 있지만,

자신의 사업에서는 여전히 남의 돈을 투자 받아 축내며 적자만 내고 있습니다. 

대기업을 다니던 시절,

팀장님은 담배를 많이 피셨지만 능력은 뛰어났습니다.

제게 혼을 내더라도, 하시는 말씀은 대부분 옳았기에,

저는 이 분에게 큰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답게 가짜 1GB짜리 멍텅구리들보다 능력이 뛰어난 팀원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느꼈던 대기업의 한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에서 특히 심한, 시스템의 작동을 위한 반항기 있는 직원 길들이기 및 걸러내기(업무와 관련 없는 합숙 연수, 워크숍, 애사심을 강조하지만 애사심이 있는 사람은 떠나가는 회사 상태 등)

2. 팀과 실무자가 무슨 제안을 하더라도, 임원이나 수뇌부가 무시하면 바뀌지 않는 프로세스

3. 퍼블리싱, 전략기획 등 절대갑 부서와 수뇌부가 행하는 이상한 의사 결정과 행동들

시스템이란 것은 쉽게 흔들려선 안 되고, 개인이 시스템을 흔드는 것은 대기업의 독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한 시간이 소중한 사업에서,

세뇌와 길들이기 연수를 열심히 유지하고,

실무나 연구 경험이 없는 부서가 힘을 휘두르는

한국의 대기업 문화는 지금도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졸업을 한 이후는 규모가 더 작은 회사에 다녔습니다.

여기는 대기업보다 더 문제가 많았습니다.

1. 능력이 없는 임원이, 대표가 직접 만든 신규 부서의 업무에 어깃장을 놓고, 대표가 시킨 일을 하는 저희를 계속 방해하였습니다.

2. 다른 부서는 업무 시간 내내 거의 회의만 하고, 본 업무를 거의 못 하고 있었습니다.

대기업에 다닐 때는 팀장님의 갈굼에 수긍했지만,

이 임원의 말은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기업 팀장보다 능력이 부족하고,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임원 덕분에,

팀은 폭발했고, 그 회사를 나온 사람들은 지금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이유가 큰 회사, 작은 회사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직접 회사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 입니다.

조 단위 대기업은 쉽지 않겠지만,

2번 회사보단 더 나은 회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무식한 용감함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아직 그 자신감이 남아있어서, 지금도 이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 주변에서는 저에게 회사를 접고, 남 밑에서 CTO를 해보는 것은 어떠냐는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저보다 뛰어난 대표님들도 있고,

제가 존경하는 대표님들도 많이 있지만,

이 분들은 저처럼 전산학을 전공하신 분들이거나,

이미 회사가 너무 커서 제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고, 가짜 1GB짜리 밑에 들어갈 이유는 당연히 없습니다.

대기업을 가면 유능한 동료도 많고, 급여도 많고, 체계도 잘 잡혀있습니다.

그런 대기업을 마다하고 존경할만한 사람도 없고, 배울 것도 없는 사기꾼의 회사에 가는 건 멍텅구리 같은 판단입니다.

 

실습실에서 같이 노숙을 하던 친구도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의욕이 있는 개발자는 다니는 회사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으면 알아서 나가게 된다."

사기꾼은 돈이 아니라면, 절대로 능력과 의욕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사람을 데려오는 방법은 있지만,

급여 싸움에서 대기업을 이길 수 있는 작은 회사는 별로 없으며,

돈만 보고 어떤 회사에 들어간 사람은 결국 돈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언제든지 그 회사를 떠나갑니다.

카리스마란 어떤 사람을 매료시키는 능력을 말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시거나, 탁월함을 보이던 분들과 함께 일할 땐,

이 분들의 말에 수긍하고, 지시를 잘 따랐습니다.

하지만, 멍청한 사람들과 사기꾼들이 자신들의 밑에 들어오라는 말을 하면,

당연히 무시를 하게 됩니다.

즉, 이런 사람들에게 카리스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과 비교되는, 저보다 코딩을 잘 하던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중 가장 가까운 집단인 같은 학번 동기들 중 일부는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거나

박사 학위를 땄거나

대기업에 있거나

전문대학원에 진학해서 자격증을 받았거나

적어도 100억 이상의 매출에 영업이익이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역시 저보다 머리가 좋은 개발자들은 고생길을 피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기꾼들은 당연히 이 친구들보다 코딩도 못 하고,

사기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귀감이 될만한 탁월함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밤새고 공부를 하다가 바닥에 상자를 깔고 잠을 잘만한 의지나

스택 트레이스를 50번 할만한 근성도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사기꾼들보다는 공부는 많이 한 것 같고,

그리고 스택 트레이스도 30번 까지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1GB 정도는 저 혼자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고,

밤새는 능력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사의 크기는 창업자의 크기라는 법칙은 1조 이하의 회사에는 충분히 적용됩니다.

1조 이상의 회사는 시스템이 없다면 움직일 수 없으며,

적어도 그동안 본 위대한 대표님들은 그 회사의 크기에 걸맞는 강력함을 갖고 계셨습니다.

 

지금 제게 필요한 건 제가 만났던 강력한 대표님들이 가진 강력한 의지

그리고 강력한 의지와 역경을 이겨낸 불굴의 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카리스마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삶을 소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카리스마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대표님들의 힘은 지금도 갈망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그분들이 가지고 계신 엄청난 힘이 없는 것 같지만,

그 힘을 갖기 위해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려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1비트도 아까운 멍텅구리들 밑엔 안 들어갑니다 ^^